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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어집주 학이편 1~14장
學而第一
[주해] 此爲書之首篇, 故所記多務本之意, 乃入道之門, 積德之基, 學者之先務也. 凡十六章. (이편은 이 책의 서두편이어서, 그래서 기록한 글이 근본에 힘쓰라는 취지의 내용이 많으니, 곧 도에 들어가는 문, 덕을 쌓는 기본은 배우는 이가 먼저 힘써야 할 것이다. 모두 16장이다.)
[1-1]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공자가 말하기를 "배우고 때때로 (그것을) 익히니, 기쁘지 아니한가. [주해] 說, 悅同. ○學之爲言效也. 人性皆善, 而覺有先後, 後覺者必效先覺之所爲, 乃可以明善而復其初也. 習, 鳥數飛也. 學之不已, 如鳥數飛也. 說, 喜意也. 旣學而又時時習之, 則所學者熟, 而中心喜說, 其進自不能已矣. 程子曰: 「習, 重習也. 時復思繹, 浹洽於中, 則說也. 」 又曰: 「學者, 將以行之也. 時習之, 則所學者在我, 故說. 」 謝氏曰: 「時習者, 無時而不習. 坐如尸, 坐時習也; 立[一]如齊, 立時習也. 」
( 說(열)자는 悅자와 같다. ○‘學의 의미는 ’본받다’(效)이다. 사람 본성이 모두 착하나, 깨달음에 시기에 선후가 있으니, 뒤에 깨달은 자는 먼저 깨달은 자가 하는 것을 반드시 본받아야, 선을 밝히고 그 처음으로 돌아갈 수 있다. 習자는 새가 날기를 되풀이하는 것(연습)을 말한다. 배워 그만두지 않는 것이 새가 날기를 되풀이하는 것과 같다. 說자는 기쁜 심정이다. 이미 배우고 또 때때로 그것을 익히면 배우는 것이 익숙해지고, 마음 속에 희열이 생기니, 그 정진함은 스스로 그만둘 수 없다. 程子는 「習자는 반복해서 익히는 것이다. 때로 다시 궁구하여 심중에 두루 미치니, 즉 기쁘다.」라고 말했고, 또 「배우는 것은 장차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서이다. 때때로 익히면, 배운 것이 나에게 있게 되어, 그러므로 기쁘다.」라고 말했다. 사씨(謝氏)는 말하기를 「時習者는 익히지 않을 때가 없다는 것이다. 앉음에 시동처럼 하여 앉을 때도 익히고, 서있음에 재계처럼 하여 섰을 때도 익힌다.」라고 했다.)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벗이 멀리에서 바야흐로 오니, 즐겁지 아니한가. [주해] 樂, 音洛. ○朋, 同類也. 自遠方來, 則近者可知. 程子曰: 「以善及人, 而信從者衆, 故可樂. 」 又曰: 「說在心, 樂主發散在外.」 ( 樂자의 음은 洛(락)이다. ○ 朋자는 같은 부류의 사람을 말한다. 自遠方來(멀리에서 이제 막 온다)는 가까운 곳의 사람도 알고 있다는 것이다. 程子가 말하기를 「善으로 남에게 미치어서, 믿고 따르는 이가 많으니, 고로 즐거워 할만하다.」또 말하기를 「說(기쁨)은 마음 안에 있고, 樂(즐거움)은 주로 발산하여 밖에 드러난다.」라고 했다.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으니, 또한 군자답지 아니한가."라고 했다. [주해] 慍, 紆問反. ○慍, 含怒意. 君子, 成德之名. 尹氏曰: 「學在己, 知不知在人, 何慍之有.」 程子曰: 「雖樂於及人, 不見是而無悶, 乃所謂君子.」 愚謂及人而樂者順而易, 不知而不慍者逆而難, 故惟成德者能之. 然德之所以成, 亦由學之正̖ 習之熟̖ 說之深, 而不已焉耳. ○程子曰: 「樂由說而後得, 非樂不足以語君子. 」
[一] 「立」, 原作 「一」, 據淸仿宋大字本改. (慍자는 반절로 紆問(운)이다. ○ 慍은 화를 머금은 심정이다. 군자는 유덕하다는 명성을 이룬 자를 말한다. 尹氏는 「배움이 나에게 있고, 알아주고 안 알아주는 것은 남에게 달려있으니, 어찌 화냄이 있으리오.」라고 말했고, 程子는 「남에게 덕망이 알려지는 것이 즐겁기는 하나, 인정을 받지 못해도 고민하지 않는 것이, 이른 바 군자이다.」 제(주자) 생각에는 덕망이 남에게 알려져 즐거운 것은 순조로워 쉬우나, 알아주지 않으나 성내지 않는 것은 일이 꼬여 어려운 것이니, 고로 오직 덕을 이룬 자만이 이를 능히 할 수 있다. 그러나 덕이 이루어지는 것은 또한 얼마나 배움이 바르고 익힘이 숙련되고 기쁨이 깊은가 달려있으니, 그것을 그만두지 않을 뿐이다. ○程子가 말하기를 「樂(즐거움)은 說(기쁨)을 거친 후에 얻어지니, 樂이 아니면 군자라고 말하기엔 부족하구나.」)
[一] 「立」자는 원래 「一」자로 되어 있는데, 淸仿宋大字本에 근거해서 고침.
[1-2] 有子曰: 「其爲人也孝弟, 而好犯上者, 鮮矣; 不好犯上, 而好作亂者, 未之有也. 유자가 말하기를 「그 사람됨이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는데, 위를 범하기를 좋아하는 자는 드물다. 위를 범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자가 난을 일으키기를 좋아하는 자는 없다.」 [주해] ●弟̖ 好, 皆去聲. 鮮, 上聲, 下同. ○有子, 孔子弟子, 名若. 善事父母爲孝, 善事兄長爲弟. 犯上, 謂干犯在上之人. 鮮, 少也. 作亂, 則爲悖逆爭鬪之事矣. 此言人能孝弟, 則其心和順, 少好犯上, 必不好作亂也. ( 弟̖, 好자는 모두 거성, 鮮자는 상성, 아래로 이와 같다. ○有子는 공자 제자로 이름은 若(약)임. 부모를 잘 섬김을 孝라 하고, 형이나 연장자를 잘 섬김을 弟라 한다. 犯上은 윗자리에 있는 사람을 범함을 말한다. 鮮은 적음이다. 作亂은 즉, 패역, 쟁투의 일을 행하는 것이다. 이는 사람이 효도하고 우애할 수 있으면 그 마음이 순하여 윗사람을 범함이 적어, 반드시 난을 일으키기를 좋아하지 않음을 말한다.)
君子務本, 本立而道生. 孝弟也者, 其爲仁之本與! 」군자는 근본에 힘쓰니, 근본이 서야 도가 생긴다. 효제라는 것은 인을 행하는 근본이구나. [주해] 與, 平聲. ○務, 專力也. 本, 猶根也. 仁者, 愛之理, 心之德也. 爲仁, 猶曰行仁. 與者, 疑辭, 謙退不敢質言也. 言君子凡事專用力於根本, 根本旣立, 則其道自生. 若上文所謂孝弟, 乃是爲仁之本, 學者務此, 則仁道自此而生也. ○程子曰: 「孝弟, 順德也, 故不好犯上, 豈復有逆理亂常之事. 德有本, 本立則其道充大. 孝弟行於家, 而後仁愛及於物, 所謂親親而仁民也. 故爲仁以孝弟爲本. 論性, 則以仁爲孝弟之本. 」 或問: 「孝弟爲仁之本, 此是由孝弟可以至仁否? 」 曰: 「非也. 謂行仁自孝弟始, 孝弟是仁之一事. 謂之行仁之本則可, 謂是仁之本則不可. 蓋仁是性也, 孝弟是用也, 性中只有箇仁̖ 義̖ 禮̖ 智四者而已, 曷嘗有孝弟來. 然仁主於愛, 愛莫大於愛親, 故曰孝弟也者, 其爲仁之本與! 」( 與자는 평성임. ○務는 힘을 하나로 집중하는 것이다. 本은 根(뿌리)과 같다. 仁은 사랑의 근본이고 마음의 덕이다. 爲仁은 行仁(인을 행한다)과 같다. 與라는 것은 의심하는 어투로, 겸허하여 감히 진솔히 말을 하지 않은 것이다. 이는 군자는 모든 일에 오로지 근본에 힘을 쓰면, 근본이 곧 설 것이니, 이러하면 그 도는 자생할 것임을 말하고 있다. 윗글에서 말하는 효제 같은 것이 곧 인을 행하는 근본이다. 배우는 이가 이것에 힘쓰면 인과 도는 이것에서 생길 것이다. ○程子는 “효제는 덕에 따르는 것이니, 고로 위를 범하기를 좋아하지 않으니, 어찌 다시 이치를 거슬리고 법도를 어지럽히는 일이 있으리오. 덕에 근본이 있으니, 근본이 확립되면, 그 도는 충만해질 것이다. 효제가 집에서 행해진 후에 인애(仁愛)가 다른 것에 미치는 것이니, 이른바 친족을 친히 하고 백성을 인으로 대하는 것이다. 고로 인을 행함은 효제로 근본을 삼는다. 본질을 논하자면, 인으로 효제의 근본을 삼는다.”라고 말했다. 혹자가 “孝弟가 인을 행하는 근본이라면, 효제로써 인에 이를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라고 물으니, 정자가 대답하기를 “아니오. 인을 행함이 효제에서 비롯되었다 함은 효제가 인의 일부의 일임을 말하니, 효제를 인을 행하는 근본이라고 하는 것은 가당하나, 효제를 인의 근본이라 하는 것은 불가하오. 대략 인은 본질의 개념이고, 효제는 그것의 작용의 개념이다. 본질 중에 단지 각각 인, 의, 예, 지 4개가 있을 뿐이니, 어찌 효제가 있던 적이 있었을까. 그러나 인은 사랑이 주된 것이고, 사랑은 친족을 사랑한 것보다 큰 것이 없으니, 고로 ‘효제란 것은 인을 행하는 근본이구나.’ 라고 말했다.)
[1-3] 子曰: 「巧言令色, 鮮矣仁! 」듣기 좋은 말과 예쁜 얼굴에는 드물구나. 인(仁)이. [주해] 巧, 好. 令, 善也. 好其言, 善其色, 致飾於外, 務以悅人, 則人欲肆而本心之德亡矣. 聖人辭不迫切, 專言鮮, 則絶無可知, 學者所當深戒也. ○程子曰: 「知巧言令色之非仁, 則知仁矣. 」 (巧는 좋은 것, 令은 예쁜 것을 말한다. 말을 듣기 좋게 하고, 형색을 예쁘게 하여, 외적인 것에 극진히 꾸미는 데 힘써서 남을 기쁘게 한다면, 그 사람은 그것을 극도로 추구하려 할 것이고, 본래 마음의 덕은 없어질 것이다. 성인은 말함에 야박하게 하지 않으니, 단지 인이 드물다(鮮)고 말했으나, 즉 절대로 인이 없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배우는 이는 마땅히 깊이 주의해야 할 것이다. ○程子가 말하기를 “듣기 좋게 꾸민 말과 예쁘게 꾸민 얼굴이 인(仁)이 아님을 안다면 인을 아는 것이다.”라고 했다.
[1-4] 曾子曰: 「吾日三省吾身: 爲人謀而不忠乎? 與朋友交而不信乎? 傳不習乎? 」 증자가 「나는 날마다 내 자신에 대해 세 가지 되돌아봤다. 남을 위하여 일을 꾀하는데 충실히 하지 않았던가. 벗과 사귐에 미덥게 하지 않았던가. 배우고서 익히지 않았던가.」라고 말했다. [주해] 省, 悉井反. 爲, 去聲. 傳, 平聲. ○曾子, 孔子弟子, 名參, 字子輿. 盡己之謂忠. 以實之謂信. 傳, 謂受之於師. 習, 謂熟之於己. 曾子以此三者日省其身, 有則改之, 無則加勉, 其自治誠切如此, 可謂得爲學之本矣. 而三者之序, 則又以忠信爲傳習之本也. ○尹氏曰: 「曾子守約, 故動必求諸身. 」 謝氏曰: 「諸子之學, 皆出於聖人, 其後愈遠而愈失其眞. 獨曾子之學, 專用心於內, 故傳之無弊, 觀於子思孟子可見矣. 惜乎! 其嘉言善行, 不盡傳於世也. 其幸存而未泯者, 學者其可不盡心乎! 」(○ 曾子는 공자의 제자로 이름은 參(삼)이고 자는 子輿(자여)이다. 자기의 진심을 다하는 것을 忠이라하고, 그것을 충실하게 하는 것을 信이라한다. 傳은 스승에게 전수받은 것을 말하고, 習은 자기에게 익숙하게 함을 이른다. 증자는 이 세 가지로 날마다 그 자신을 반추하여 잘못이 있으면 고치고, 없으면 더욱 힘썼다. 그 스스로를 닦음에 성실하기가 이러하니, 배움의 근본을 행했다고 할 만하다. 세 가지의 순서는 즉, 충신(忠信)으로 배우고 익히는 것의 근본으로 삼는 것이다. ○尹氏는 “증자는 지키는 것이 간단하니, 고로 행동함에 반드시 자신에게 잘못된 점을 구했다.”라고 말했다. 謝氏는 말하기를 “제자(여러 학설가)의 학문은 모두 성인(공자)에게서 나왔다. 그 후에는 더욱 멀어져 그 참됨을 더욱 잃었다. 홀로 증자의 학문은 오로지 내적인 것에 힘을 기울여서, 고로 그것을 전함에 훼손이 없었고, 자사에게 사사하니, 맹자가 나타날 수 있었다. 애석하도다. 그 훌륭한 말과 좋은 행동을 세상에 다 전하지 못함이여. 다행히 남아있어 아직 없어지지 않은 것이 있으니, 배우는 이는 마땅히 마음을 다하지 않을 것인가.”)
[1-5] 子曰: 「道千乘之國: 敬事而信, 節用而愛人, 使民以時.」 공자가 「천승의 나라를 다스림에 일에 전념하여 미더움을 받도록 하고, 씀씀이를 아끼고 인민을 아끼고, 때에 맞게 백성을 부려라.」라고 말했다. [주해] 道̖ 乘, 皆去聲. ○道, 治也. 馬氏云: 「八百家出車一乘. 」 [一]千乘, 諸侯之國, 其地可出兵車千乘者也. 敬者, 主一無適之謂. 敬事而信者, 敬其事而信於民也. 時, 謂農隙之時. 言治國之要, 在此五者, 亦務本之意也. ○程子曰: 「此言至淺, 然當時諸侯果能此, 亦足以治其國矣. 聖人言雖至近, 上下皆通. 此三言者, 若推其極, 堯舜之治亦不過此. 若常人之言近, 則淺近而已矣. 」 楊氏曰: 「上不敬則下慢, 不信則下疑, 下慢而疑, 事不立矣. 敬事而信, 以身先之也. 易曰: 『節以制度, 不傷財, 不害民. 』 蓋侈用則傷財, 傷財必至於害民, 故愛民必先於節用. 然使之不以其時, 則力本者不獲自盡, 雖有愛人之心, 而人不被其澤矣. 然此特論其所存而已, 未及爲政也. 苟無是心, 則雖有政, 不行焉. 」 胡氏曰: 「凡此數者, 又皆以敬爲主. 」 愚謂五者反復相因, 各有次第, 讀者宜細推之.
[一] 「馬氏云八百家出車一乘」 十字, 據淸仿宋大字本補. ( 道,̖ 乘는 모두 거성임. ○道는 ‘다스리다’(治)를 의미한다. 馬氏는 “800 가구당 한 수레가 난다.”라고 말했다. 千乘은 제후 등급의 나라로, 그 땅은 전차 천 대가 나올 수 있는 나라이다. 敬은 한곳에 주력하여 다른 데로 한눈을 팖이 없음을 말한다. ‘敬事而信’라는 것은 일에 전념하여 백성에게 미더움을 사는 것이다. 時는 농사철 사이의 때를 말한다.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는 이 다섯 가지에 있다는 것을 말하니, 또한 근본에 힘쓰라는 의미이다. ○ 程子가 말하기를 “이런 말은 너무 흔하나, 당시 제후가 이를 실제로 이를 능히 할 수 있었다면, 또한 나라를 족히 다스릴 수 있었을 것이다. 성인은 비록 지극히 하찮은 것을 말해도, 위아래가 다 통한다. 이 세 마디 말, 이것을 밀고나가 완수한다면, 요.순의 다스림도 이것에 불과할 것이다. 만약 보통 사람이 흔한 것을 말하면, 단지 천박할 것이다.”라고 했다. 楊氏가 “윗사람이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아랫사람이 게으를 것이고, (백성에게) 미더움을 사지 못한다면 아랫사람이 의심할 것이다. 아랫사람이 게으르고 의심한다면 일은 성립되지 않을 것이다. 일에 전념해 미더움을 얻은 것은 자신이 먼저 했기 때문이다. 易에 이르기를 『절도로 제도를 제정하고, 재물에 손상을 입히지 않으며, 백성에 해를 끼치지 않는다.』대체로 씀씀이가 헤프면 재물에 피해를 주고, 재물에 피해가 가면 반드시 백성에게 해를 끼친다. 그래서 백성을 아낌에 반드시 먼저 씀씀이를 절제한다. 그러나 때에 맞지 않게 백성을 부린다면, 근본에 힘쓰는 자도 스스로 전력을 다하지 못할 것이다.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도, 백성은 그 혜택을 입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다만 백성을 원론적으로 돌보는 것을 논했을 따름이고, 구체적으로 정사를 행함은 언급하지 않았다. 진실로 이런 마음이 없으면, 정사를 행함은 있어도 그것을 행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胡氏는 말하기를 “대체로 이 열거한 것들은, 또한 모두 敬이 중점이 된다.” 제 생각에는 다섯 가지는 순환하여 서로 연관이 있다. 각자 차례가 있으니, 읽는 이는 의당 자세히 미뤄 추지하라. )
[1-6] 子曰: 「弟子入則孝, 出則弟, 謹而信, 汎愛衆, 而親仁. 行有餘力, 則以學文. 」 공자가 「제자는 (집에) 들어가면 효를 행하고, 나오면 우애를 행하고, 행실을 근신하게 하고 말한 것은 행하고, 많은 사람을 널리 아끼고 인자를 친애해야 한다. (이것을) 행하고 남은 힘이 있거든 글을 배워야 한다.」라고 말했다. [주해] 弟子之弟, 上聲. 則弟之弟, 去聲. ○謹者, 行之有常也. 信者, 言之有實也. 汎, 廣也. 衆, 謂衆人. 親, 近也. 仁, 謂仁者. 餘力, 猶言暇日. 以, 用也. 文, 謂詩書六藝之文. ○程子曰: 「爲弟子之職, 力有餘則學文, 不修其職而先文, 非爲己之學也.」 尹氏曰: 「德行, 本也. 文藝, 末也. 窮其本末, 知所先後, 可以入德矣.」 洪氏曰: 「未有餘力而學文, 則文滅其質; 有餘力而不學文, 則質勝而野.」 愚謂力行而不學文, 則無以考聖賢之成法, 識事理之當然, 而所行或出於私意, 非但失之於野而已.(弟子의 弟자는 상성이고, 弟의 弟자는 거성이다. ○謹은 행실에 법도가 있는 것이다. 信은 말에 실천이 있는 것이다. 汎은 ‘널리’를, 衆은 많은 사람을 말한다. 親은 가까이함을, 仁은 仁者를 이른다. 餘力은 한가한 날을 말하는 것과 같다. 以는 ‘가지고써(用)’를 文은 시, 서, 육예 등의 문예를 말한다. ○程子는 말하기를 “제자의 직분을 행하고, 힘이 남으면 글을 배우라. 그 직분을 닦지 않고, 글을 먼저 배우면 자기를 위한 배움이 아니다.”라고 했다. 尹氏는 “덕행은 근본이고, 문예는 말단이다. 그 본말을 궁구하여, 먼저 할 것과 나중에 할 것을 알아야 덕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다.”라고 했다. 洪氏는 “남은 힘이 없는데 글을 배우면 글이 그 본질을 없애고, 남은 힘이 있어도 글을 배우지 않으면, 본질만 극성하여 조야하게 된다.” 나의 생각은 이러하다. 힘써 행하고 글을 배우지 않으면, 성현이 이룬 법도를 살필 수 없고, 사리의 당연함도 알 수 없어, 하는 행위가 늘 사사로운 뜻에서 나오니, 실수하는 것이 단지 조야해서만은 아니다.)
[1-7] 子夏曰: 「賢賢易色, 事父母能竭其力, 事君能致其身, 與朋友交言而有信. 雖曰未學, 吾必謂之學矣.」자하가 「현인을 현인으로 받듦에 낯빛을 바꾸어 공손히 하고, 어버이를 섬김에 온힘을 다하고, 임금을 섬기되 몸을 바치고, 벗과 사귐에 미더움이 있게 하라. (이러하면) 비록 (그가) 배우지 않았더라도, 나는 꼭 그 사람을 배웠다고 말하리라.」라고 말했다. [주해]子夏, 孔子弟子, 姓卜, 名商. 賢人之賢, 而易其好色之心, 好善有誠也. 致, 猶委也. 委致其身, 謂不有其身也. 四者皆人倫之大者, 而行之必盡其誠, 學求如是而已. 故子夏言有能如是之人, 苟非生質之美, 必其務學之至. 雖或以爲未嘗爲學, 我必謂之已學也. ○游氏曰: 「三代之學, 皆所以明人倫也. 能是四者, 則於人倫厚矣. 學之爲道, 何以加此. 子夏以文學名, 而其言如此, 則古人之所謂學者可知矣. 故學而一篇, 大抵皆在於務本.」 吳氏曰: 「子夏之言, 其意善矣. 然辭氣之間, 抑揚太過, 其流之弊, 將或至於廢學. 必若上章夫子之言, 然後爲無弊也.」 (子夏는 공자의 제자로, 성은 卜이고 이름은 商이다. 현인을 현인으로 존경하고, 여색을 좋아하는 마음을 바꾸니, 성의를 갖고 훌륭한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다. 致는 ‘바치다(委)’와 같다. ‘그 몸(자신)을 바치는 것(委致其身)’은 그 몸을 돌보지 않음을 말한다. 네 가지는 모두 인륜의 중대하고, 행함에 반드시 그 성의를 다해야 하니, 배워 구할 것은 이런 것이다. 그래서 자하는 ‘그처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진실로 타고난 본질이 아름답거나, 아니면 배움에 힘씀이 지극한 것이니, 비록 혹자가 그가 정식으로 배운 것이 없다고 해도, 나는 그를 반드시 이미 배웠다고 말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游氏는 “삼대(夏,殷,周)의 학문은 모두 인륜을 밝히는 것이다. 이 네 가지를 능히 할 수 있는 자는 곧, 인륜에 두터워지니, 배움의 근본에 무엇이 더 필요할까. 子夏는 문학으로 유명한데, 그의 말이 이러하니, 곧 옛사람이 말하는 배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도다. 고로 학이(學而) 일편은 요체가 다 근본에 힘쓰라는 데에 있다.”라고 했다. 吳氏는 말하기를 “자하의 말이 그 의도는 좋다. 그러나 그 말의 기세에 어조가 너무 확신에 차, 그 과도함의 폐해가 혹시 배움을 그만두게 함에 이를까싶다. 반드시 위 장(章)의 공자의 말처럼 한 뒤에야 폐해가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1-8] 子曰: 「君子不重則不威, 學則不固. 공자가 「군자는 (행실이) 중후하지 않으면, 위엄이 서지 않고 배워도 견고하지 않는다. [주해]重, 厚重. 威, 威嚴. 固, 堅固也. 輕乎外者, 必不能堅乎內, 故不厚重則無威嚴, 而所學亦不堅固也. (重은 중후함이고 威는 위엄이고, 固는 견고함이다. 겉 행실이 가벼운 자는 반드시 안 속내도 굳건히 할 수 없다. 그러므로 행실이 중후하지 않으면 위엄이 없고, 배운 것도 견고하지 못한다.)
主忠信. 충신(忠信)에 힘쓰고, [주해]人不忠信, 則事皆無實, 爲惡則易, 爲善則難, 故學者必以是爲主焉. 程子曰: 「人道惟在忠信, 不誠則無物, 且出入無時, 莫知其鄕者, 人心也. 若無忠信, 豈復有物乎? 」( 사람이 충신(忠信)이 없으면 일이 모두 알맹이가 없으니, 악을 행하기는 쉽고 선을 행하기는 어렵다. 고로 배우는 이는 반드시 충신을 주안점으로 삼는다. 程子는 말하기를 “사람의 도는 오직 충신에 있으니, 그러하지 않다면 사람됨이 없을 것이다. 또 드나듦에 때가 없고 아무도 그 방향을 모르는 것이 사람 마음이니, 만일 충신이 없다면 어찌 다시 사람됨이 있으리오.”)
無友不如己者. 자기보다 못한 자하고 사귀지 마라. [주해]無̖ 毋通, 禁止辭也. 友所以輔仁, 不如己, 則無益而有損. (無는 毋자와 통용되고, 금지사이다. 친구는 인(仁)을 보충해 주는 존재이니, 나보다 못하면 이익은 없고 손해는 있게 된다.)
過則勿憚改.」잘못이 있으면 고치기를 거리끼지 마라.」라고 말했다. [주해]勿, 亦禁止之辭. 憚, 畏難也. 自治不勇, 則惡日長, 故有過則當速改, 不可畏難而苟安也. 程子曰: 「學問之道無他也, 知其不善, 則速改以從善而已. 」 ○程子曰: 「君子自修之道當如是也.」游氏曰: 「君子之道, 以威重爲質, 而學以成之. 學之道, 必以忠信爲主, 而以勝己者輔之. 然或吝於改過, 則終無以入德, 而賢者亦未必樂告以善道, 故以過勿憚改終焉. 」( 勿은 역시 금지를 나타내는 단어이다. 憚은 멀리하거나 곤란해 하는 것이다. 스스로를 수양함에 과감하지 않으면 악은 날마다 자란다. 고로 잘못이 있으면 마땅히 빨리 고쳐야 되고, 꺼리어 구차히 편안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程子는 “학문의 도는 다른 것이 없고, 옳지 못함을 알았다면, 빨리 고쳐 옳음을 따를 따름이다.”라고 말했다. ○程子는 말하기를 “군자가 스스로 수양하는 도는 마땅히 이래야 한다.”라고 했다. 游氏는 “군자의 도는 위엄으로 본질을 삼고, 배움으로 그것(군자의 도)을 완성시킨다. 배움의 도는 반드시 충신으로 주축을 삼고, 자기보다 나은 사람으로 그것을 보충하게 한다. 그러나 혹시 허물을 고침에 인색하면, 끝내 덕에 이를 수 없고, 현자도 반드시 선한 도로써 즐겨 고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허물이 있거든 고치기를 꺼리지 말라(過勿憚改)’로 끝낸 것이다.”라고 말했다.)
[1-9] 曾子曰: 「愼終追遠, 民德歸厚矣.」증자는「 (지도자가) 어버이의 상에 공경을 다하고 조상을 추모하면, 백성의 덕성이 두터워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주해]愼終者, 喪盡其禮. 追遠者, 祭盡其誠. 民德歸厚, 謂下民化之, 其德亦歸於厚. 蓋終者, 人之所易忽也, 而能謹之; 遠者, 人之所易忘也, 而能追之: 厚之道也. 故以此自爲, 則己之德厚, 下民化之, 則其德亦歸於厚也. ( 愼終이라 함은 상을 당함에 그 예를 다함이요. 追遠이라 함은 제사에 그 성심을 다함이다. 民德歸厚는 아래 백성들이 그것에 교화되고, 백성의 덕이 또한 두터워짐을 말한다. 대저 죽은 자는 사람이 소홀하기가 쉬운데, 공경할 수 있고, 죽은 지 오래된 자는 사람이 잊기가 쉬운데, 추모할 수 있는 것은 후덕함의 도이다. 고로 이것을 스스로 행하면 곧, 자기의 덕이 두터워지고, 아래 백성이 교화되니, 즉 백성의 덕도 또한 두터워지는 것이다.)
[1-10] 子禽問於子貢曰: 「夫子至於是邦也, 必聞其政, 求之與? 抑與之與? 」 자금이 자공에게 「선생(공자)은 그 나라에 가면, 반드시 그 정사를 듣습니다. 이는
선생이 구한 것입니까. 아니면 그들이 스스로 해 주는 것입니까.」라고 물었다. [주해] 之與之與, 平聲, 下同. ○子禽, 姓陳, 名亢. 子貢, 姓端木, 名賜. 皆孔子弟子. 或曰: 「亢, 子貢弟子. 」 未知孰是. 抑, 反語辭. ( ○子禽은 성은 陳이고 이름은 亢이고, 子貢은 성이 단목이고 이름은 賜(사)이다. 모두 공자의 제자이다. 간혹 亢은 자공의 제자라고 하고 하니, 무엇이 맞는지 모르겠다. 抑은 반어사이다.)
子貢曰: 「夫子溫良恭儉讓以得之. 夫子之求之也, 其諸異乎人之求之與? 」 자공이 「 온화함, 어짊, 공경함, 검소함, 겸양함으로 그것을 얻어낸 것이오. 선생이 그것을 구함은 그 남이 그것을 구함과 다르오.」라고 말했다. [주해]溫, 和厚也. 良, 易直也. 恭, 莊敬也. 儉, 節制也. 讓, 謙遜也. 五者, 夫子之盛德光輝接於人者也. 其諸, 語辭也. 人, 他人也. 言夫子未嘗求之, 但其德容如是, 故時君敬信, 自以其政就而問之耳, 非若他人必求之而後得也. 聖人過化存神之妙, 未易窺測, 然卽此而觀, 則其德盛禮恭而不願乎外, 亦可見矣. 學者所當潛心而勉學也. ○謝氏曰: 「學者觀於聖人威儀之間, 亦可以進德矣. 若子貢亦可謂善觀聖人矣, 亦可謂善言德行矣. 今去聖人千五百年, 以此五者想見其形容, 尙能使人興起, 而況於親炙之者乎?」 張敬夫曰: 「夫子至是邦必聞其政, 而未有能委國而授之以政者. 蓋見聖人之儀刑而樂告之者, 秉彝好德之良心也, 而私欲害之, 是以終不能用耳. 」( 溫은 온화, 良은 간편함, 恭은 공경, 儉은 절제, 讓은 겸손이다. 다섯 가지는 선생(공자)의 훌륭한 덕이 빛나 남에게 전해진 것이다. 其諸는 어조사이다. 人은 타인이다. 이는 공자는 그것을 구한 적이 없고, 다만 그 덕스러운 모습이 이와 같아, 고로 그 당시 왕이 경신(敬信)하여, 스스로 그 정사로써 와서 물었을 뿐이지, 타인처럼 꼭 구하려고 한 뒤에 얻은 것이 아님을 말한다. 성인이 지나가는 곳은 교화되고 머무는 곳은 신령스러워지는 신기함은 쉽게 예측할 수 없으나, 이것에 비추어서 본다면 공자의 덕이 충만하고 예가 공손하여 겉으로 청원하지 않음을, 또한 짐작할 수 있다. 배우는 이는 의당 마음을 차분히 하고 힘써 배워야 할 바이다. ○謝氏는 말하기를 “배우는 이는 성인의 위엄과 예의의 면모를 보면, 역시 덕을 향상할 수 있다. 자공 같은 이도 성인을 잘 알아보고 할 만하고, 또한 덕행을 잘 말한다고 할 만하다. 지금 성인과 떨어진 시기가 천오백년인데, 이 다섯 가지로 그 모습을 상상해서 보아도, 아직도 사람들 하여금 자극을 일으키니, 더군다나 친히 말을 들은 사람이야.” 張敬夫는 말하기를 “공자는 그 나라에 이르면 반드시 그 정사를 들었으나, 나라를 맡기고 정사를 공자에게 받치는 자는 없었다. 대저 성인의 모범을 보고 성인에게 고하기를 즐기는 자는 덕을 좋아하는 양심을 지녔으나 사욕이 이를 해치니, 이 까닭에 끝내 등용할 수 없었던 것 같다.)
[1-11] 子曰: 「父在, 觀其志; 父沒, 觀其行; 三年無改於父之道, 可謂孝矣. 」공자가 「아버지가 살아있을 때엔 그(자식) 뜻을 보고,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엔 그 행실을 보아라. 삼년 동안 아버지의 도(방식)를 고침이 없으면 가히 효성스럽다고 말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주해]行, 去聲. ○父在, 子不得自專, 而志則可知. 父沒, 然後其行可見. 故觀此足以知其人之善惡, 然又必能三年無改於父之道, 乃見其孝, 不然, 則所行雖善, 亦不得爲孝矣. ○尹氏曰: 「如其道, 雖終身無改可也. 如其非道, 何待三年. 然則三年無改者, 孝子之心有所不忍故也. 」 游氏曰: 「三年無改, 亦謂在所當改而可以未改者耳. 」 ○아버지가 살아있을 때는 자식이 혼자 전제하지 않으니 그 뜻을 알 수 있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그 행실을 알 수가 있다. 고로 이것을 살펴 충분히 그 사람의 선악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또 반드시 삼년 동안 아버지의 도를 고치지 않아야, 그 효성스러움을 알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소행이 좋더라도, 역시 효성스럽다고 할 수 없다. ○尹氏는 “만일 아버지의 도(방식)가 옳은 것이면 일생 동안 고침이 없을 것이고, 만일 아버지의 도가 그른 것이면 어찌 삼년을 기다릴까. 그렇다면 ‘삼년 동안 고침이 없다.’는 것은 효자의 마음에 차마 아버지의 도를 고치지 않게 하는 요인이 있음을 말한다.”라고 말했다. 游氏는 “‘삼년 동안 고침이 없다.’함은 또한 의당 고쳐야 하나, 가히 아직 고치지 않은 것이 있음을 이른다.”라고 말했다.
[1-12] 有子曰: 「禮之用, 和爲貴. 先王之道斯爲美, 小大由之. 유자(有子)가 말하기를 「禮를 행함에 온화함이 귀중한 것이다. 선왕의 도를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작고 큰 것(예)이 다 그것(和)에 말미암기 때문이다. [주해]禮者, 天理之節文, 人事之儀則也. 和者, 從容不迫之意. 蓋禮之爲體雖嚴, 而皆出於自然之理, 故其爲用, 必從容而不迫, 乃爲可貴. 先王之道, 此其所以爲美, 而小事大事無不由之也. (禮는 천리의 규범이고, 인사의 규칙이다. 和는 종용(從容)하고 긴박하지 않은 마음가짐이다. 아마 禮의 본질은 비록 엄하나, 모두 자연의 이치에서 나오니, 고로 그 행함에는 반드시 종용하고 긴박하지 않게 함이 귀중하다고 하는 듯하다. 선왕의 도, 이것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작은 일과 큰 일이 다 그것(和)에 말미암지 않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有所不行, 知和而和, 不以禮節之, 亦不可行也. 」행하지 않을 바가 있으니, 온화함만 의식하여 온화하려고만 하고 예로 절제하지 않는 것은 또한 행해서는 안 된다.」 라고 했다. [주해]承上文而言, 如此而復有所不行者, 以其徒知和之爲貴而一於和, 不復以禮節之, 則亦非復理之本然矣, 所以流蕩忘反, 而亦不可行也. ○程子曰: 「禮勝則離, 故禮之用和爲貴. 先王之道以斯爲美, 而小大由之. 樂勝則流, 故有所不行者, 知和而和, 不以禮節之, 亦不可行. 」 范氏曰: 「凡禮之體主於敬, 而其用則以和爲貴. 敬者, 禮之所以立也; 和者, 樂之所由生也. 若有子可謂達禮樂之本矣. 」 愚謂嚴而泰, 和而節, 此理之自然, 禮之全體也. 毫釐有差, 則失其中正, 而各倚於一偏, 其不可行均矣. ( 윗글에 이어서 이렇게 다시 행하지 않을 바가 있다고 말한 것은 단지 온화함이 귀한 것임만 알고 온화함에만 전념하여, 다시 예로 그것을 절제하지 못하면, 역시 이치로 되돌아가는 본연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번 흘러가서 되돌아올 줄 모르는 것은 역시 행해서는 안된다. ○程子는 말하기를 “예가 극성하면 괴리되어서, 예의 사용에 온화함이 귀한 것이다. 선왕의 도를 가지고 아름답다고 하는 것도 작고 큰 일이 그것을 거쳐오기 때문이다. 즐거움이 극성하면 과하게 되니, 고로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다. 온화함만 알고 온화하려고만 하면 예로 절제할 수 없으니, 역시 행해서는 안 된다.” 范氏는 말하기를 “모든 예의 본질은 공경에 주안점을 두나, 실제로 사용할 때엔 온화함을 귀한 것으로 여긴다. 敬이란 것은 예가 이것(敬)으로써 성립되는 것이고, 和란 것은 樂이 이것(和)을 통하여 생기는 것이다. 有子와 같은 이는 예악의 근본에 통달했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생각하기엔 엄하되 너그럽고, 온화하되 절제하는 것, 이것이 이치의 본질, 예의 전부이니, 터럭이라도 어긋남이 있으면 그 중심을 잃어, 각자 한쪽으로 치우치어, 그 균형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1-13] 有子曰: 「信近於義, 言可復也; 恭近於禮, 遠恥辱也; 因不失其親, 亦可宗也. 」유자가 「약속이 의에 가까워야 그 말은 실천할 수 있고, 공손함이 예에 가까워야 치욕을 멀리할 수 있다. 이렇게 그 가까이 할 것(義, 禮)을 잃지 않으면, 또한 수장(首長)으로 받들 수 있다.」라고 말했다. [주해]近, 遠 皆去聲. ○信, 約信也. 義者, 事之宜也. 復, 踐言也. 恭, 致敬也. 禮, 節文也. 因, 猶依也. 宗, 猶主也. 言約信而合其宜, 則言必可踐矣. 致恭而中其節, 則能遠恥辱矣. 所依者不失其可親之人, 則亦可以宗而主之矣. 此言人之言行交際, 皆當謹之於始而慮其所終, 不然, 則因仍苟且之間, 將有不勝其自失之悔者矣. ○信은 약속이다. 義는 일의 타당함이다. 復(복)은 말을 실천함이다. 恭은 공경을 다함이고, 禮는 규범이다. 因은 依(의지하다)와 뜻이 같고, 宗은 主(우두머리)와 같다. 이는 약속을 맺되 그 당의에 맞으면 그 말은 꼭 실천할 수 있고, 공경을 다하되 그 규범에 맞으면 치욕을 멀리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의지를 받는 자가 가히 친하게 지내야 할 사람을 잃지 않는다면, 또한 그를 받들어서 수장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사람의 언행과 교제는 모두 마땅히 시작함에 신중하고 그 끝냄에도 염두에 두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구차해질 때에 장차 스스로 실수한 것에 대한 후회를 금하지 못할 때가 있을 것이다.
[1-14] 子曰: 「君子食無求飽, 居無求安, 敏於事而愼於言, 就有道而正焉, 可謂好學也已. 」 공자가 「군자는 먹음에 배부름을 구하지 않고 거처함에 편안함을 구하지 않고, 일에는 민첩하고 말에는 조심하고, 도가 있는 것(사람)에 나아가 바로잡으면, 가히 배움을 좋아한다고 할 만하다.」라고 말했다. [주해]好, 去聲. ○不求安飽者, 志有在而不暇及也. 敏於事者, 勉其所不足. 愼於言者, 不敢盡其所有餘也. 然猶不敢自是, 而必就有道之人, 以正其是非, 則可謂好學矣. 凡言道者, 皆謂事物當然之理, 人之所共由者也. ○尹氏曰: 「君子之學, 能是四者, 可謂篤志力行者矣. 然不取正於有道, 未免有差, 如楊墨學仁義而差者也, 其流至於無父無君, 謂之好學可乎? 」○ ‘편안하고 배부름을 구하지 않는다’고 함은, 뜻이 따로 있어 거기에 미칠 겨를이 없다는 것이다. 敏於事(일에 재빠르다)라 함은 그 부족한 것에 힘쓰는 것이고, 愼於言(말에 신중하다.)라 함은 더 말할 바가 있는데 말을 다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하고도 오히려 자신을 감히 스스로 옳게 여기지 않고, 반드시 도가 트인 사람에게 나아가서, 그 시비를 바로 할 수 있다면, 배움을 좋아한다고 할 만하다. 무릇 도를 말하는 자는 모두 사물의 당연한 이치를 언급하니, 우리가 함께 따라야 하는 자이다. ○尹氏는 말하기를 “군자의 배움이 능히 이 네 가지를 행하다면, 뜻을 돈독히 하고 힘써 행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바름을 도가 있는 이에게서 취하지 못하면, 어긋남이 있게 됨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양주와 묵자 같은 이는 인의를 배우고도 어긋나니, 아비를 없이 여기고 임금을 없이 여기는 지경까지 흘러가니, 그것을 배움을 좋아한다고 하는 것이 가당하리오.”라고 했다.
[1-15] 子貢曰: 「貧而無諂, 富而無驕, 何如? 」 子曰: 「可也. 未若貧而樂, 富而好禮者也.」 자공이 「가난하되 아첨하지 않고, 부유하되 교만하지 않는 것은 어떻습니까.」라고 물으니, 공자가 「나름대로 괜찮은데, 가난하면서도 즐겁게 살고,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것보다는 못 하구나.」라고 말했다. [주해] 樂, 音洛. 好, 去聲. ○諂, 卑屈也. 驕, 矜肆也. 常人溺於貧富之中, 而不知所以自守, 故必有二者之病. 無諂無驕, 則知自守矣, 而未能超乎貧富之外也. 凡曰可者, 僅可而有所未盡之辭也. 樂則心廣體胖而忘其貧, 好禮則安處善, 樂循理, 亦不自知其富矣. 子貢貨殖, 蓋先貧後富, 而嘗用力於自守者, 故以此爲問. 而夫子答之如此, 蓋許其所已能, 而勉其所未至也. (○諂은 비굴이고, 驕는 방자함이다. 보통사람은 빈부의 수렁에 빠져 스스로 지킬 줄을 모른다. 고로 두 가지의 병폐가 있다. 아첨함이 없고 교만함이 없으면 스스로 지켜야 할 줄은 아는 것이나, 아직 빈부의 한계 밖으로 초월해 간 것은 아니다. 대체로 ‘괜찮다(可)’고 말한 것은 간신히 옳다는 것으로 아직 미진함이 있다는 말이다. ‘즐겁게 산다(樂)’는 것은 마음이 넓어지고 몸이 편안해져서 그 가난에 구애받지 않음을, ‘예를 좋아한다(好禮)’는 것은 편안히 선(善)에 머무르고, 즐겨 이치를 따라서 또한 스스로 그 부유함에 구애받지 않음을 암시한다. 子貢이 재물이 늘었는데, 아마 처음엔 가난했다가 나중에 부유해졌는데도, 전에 스스로 지키는 것에 힘쓴 경험이 있어, 고로 이런 것을 질문하고 공자가 이와 같이 답하는 듯하다. 대강, 우선은 그 잘 한 행위를 인정하고, 아직 부족한 것에 노력하라는 취지인 듯하다.)
子貢曰: 「詩云: 『如切如磋, 如琢如磨.』 其斯之謂與? 」 磋, 七多反. 與, 平聲. ○詩衛風淇澳之篇, 言治骨角者, 旣切之而復磋之; 治玉石者, 旣琢之而復磨之; 治之已精, 而益求其精也. 子貢自以無諂無驕爲至矣, 聞夫子之言, 又知義理之無窮, 雖有得焉, 而未可遽自足也, 故引是詩以明之. 자공이 「시에서 ‘(뼈나 뿔을) 잘라내고 갈 듯이, (옥이나 돌을) 쪼고 갈 듯이’라고 한 것은 이것을 두고 말한 겁니까.」라고 물었다. [주해] (○시는 위풍(衛風) 기오(淇澳)의 편으로, 이는 각골을 다루는 자가 칼로 잘라내고 다시 줄로 갈고, 옥석을 다루는 자가 망치로 쪼고 다시 사석으로 갈고, 다루는 것이 이미 정교해도 더욱 정교하게끔 애씀을 말한다. 자공이 아첨함이 없고 교만함이 없음을 지극한 것으로 생각했다가, 공자의 말을 듣고서 또 도리가 무궁하여, 그런 수준(無諂無驕)에 이르러도 성급하게 만족해 할 수는 없음을 깨닫고, 고로 이 시를 인용하여 그런 점을 꼬집어 말한 것이다.)
子曰: 「賜也, 始可與言詩已矣! 告諸往而知來者.」 공자가 「사(賜)는 비로소 가히 더불어 시를 이야기할 만하구나. 가는 곳을 말해 주니 오는 곳을 아는구나.」[주해] 往者, 其所已言者. 來者, 其所未言者. ○愚按: 此章問答, 其淺深高下, 固不待辨說而明矣. 然不切則磋無所施, 不琢則磨無所措. 故學者雖不可安於小成, 而不求造道之極致; 亦不可騖於虛遠, 而不察切己之實病也. (‘往’은 이미 말한 것, ‘來’는 아직 말하지 않은 것이다. ○내가 이 장의 문답을 상고하건데, 그 깊이나 높음의 정도가 굳이 따지지 않아도 뻔한 것이다. 그러나 잘라내지 않으면 갈려고 해도 갈 데가 없고, 쪼지 않으면 갈려고 해도 갈 데가 없다. 그래서 배우는 이는 즉 작은 성취에 만족하여 도의 최선을 이루려고 하지 않으면 안 되고, 또한 허황된 것에 힘쓰느라 자기의 중대한 문제점을 고치려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1-16] 子曰: 「不患人之不己知, 患不知人也. 」 공자가 말했다. 「남이 나를 몰라보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몰라봄을 걱정하라.」[주해]尹氏曰: 「君子求在我者, 故不患人之不己知. 不知人, 則是非邪正或不能辨, 故以爲患也. 」( 尹氏는 말하기를 “군자는 탓하는 것이 나에게 있는 자이니, 고로 남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않는다. ‘남을 몰라본다(不知人)’는 것은 곧 옳고 그름, 바르고 사악함을 혹 구별할 수 없는 것이니, 고로 그것으로 걱정을 삼는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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