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봄 눈

새암 2005. 5. 6. 15:49

○ 봄눈

 

  입학 다음 날. 어제부터 흐리던 하늘이 낮게 내려앉더니 새벽부터 눈발을 뿌렸다. 출근길엔 소담스러운 눈이 예쁘게 내려왔다. 날이 푹한지라 눈 바닥은 미끄럽지 않아 출근 길 차들은 잘들 달렸다. 차들이나 사람들은 봄눈의 반가움에 질척거림엔 아랑곳하지 않고 봄눈을 즐겼다.
  구둣발이 묻힐 정도로 눈이 쌓였다. 교문을 들어서니 하얀 눈 덮인 운동장은 아득하게 멀어 보였다. 소복소복 눈 덮인 나무들은 나지막해져 동화 속 궁전에라도 온 듯하여 잊었던 고향의 모습을 떠올렸다.

  밤 새 눈 나린 날 아침. 장독대 크고 작은 단지 위에 소복소복 쌓인 눈을 보는 순간 신비함에 놀라 알 수 없는 탄성이 새어 나왔다. 가만가만 다가가 눈을 박고 혀를 얼굴을 살짝 대보다 사르르 허물어지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뜰팡 눈 쓸어 내고 엄니 장독대 가는 길 몽당빗자루로 쓸었다.  뒷간 가는 길, 마당을 가로질러 싸리문까지 손 호호 불며 눈가래로 길 낼 때쯤엔 어머니께서 나오시어 칭찬이 대단하셨다. 급히 아궁이에 불 지피시곤 내 손 끓어 불 앞에서 만지작거리셨다.
  다른 사람이 마을 길 내기 전에 내가 먼저 눈길 뚫고 싶은 호기에 눈가래 급히 끌고 싸리문 밖으로 간다. 왼쪽 오른쪽으로 눈 밀어 던지다 보면 콧등엔 땀이 송골송골, 허연 입김은 황소 콧구멍에서처럼 쉭쉭 샌다.
  '일찍 나와 눈 치우는구나. 장하다.' 옆집 아저씨의 칭찬에 날아 갈 듯했다.  허리가 펴지지 않을 듯 힘에 부쳐도 누군가 날 볼 때까지 하려는, 자랑하고 싶은 어린 마음에서 눈을 치우곤 했다.

  출입구 계단의 눈은 플라스틱 빗자루로 쓸었으나 교실 연결 통로는 어림도 없다. 눈 바닥이 녹아 있어서 꼼짝도 안 했다.
  하얀 우산 속에 묻혀 등교하는 엄마 아이들 모습들이 정겹다. 우산에 쌓인 눈을 털고, 눈송일 손으로 받고, 엄마발자국을 따라 겅중겅중 걷다 두 손으로 눈을 뭉치다 하늘을 보곤 두 팔 벌려 눈을 맞는다. 그림보다 예쁘다.
  우산 말아 양동이에 정리하고 신발장 번호 찾아 신발 정리시켜 교실로 맞았다. 아이들 이름 불러 하나하나 확인하고 키순으로 짝을 지어 자리를 정해주는 동안에도 창밖의 눈은 쉼이 없다. 조금 전보다도 더 커진 눈이 펑펑 내린다. 창문을 활짝 열었다. '와-!' 눈 오는 모습을 본 아이들이 내 아이 행동에 눈길 뺏겼던 엄마들이 소리쳤다. 내 생애 처음 보는 큰 눈이다. 목화송이 만한 무거운 눈덩이가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누리망에서 동요를 찾아 따라 부르게 했다. '펄펄 눈이 옵니다. 송이송이 하얀 솜을…….' 아이들 목소리 점점 커지더니 엄마들 손뼉에 화음까지 어우러져 크게크게 눈 속으로 빨려 나갔다. 그러나 지금처럼 오는 눈을 표현하기엔 그 느낌이 부족했다. 운동장 눈 속으로 끌고 나가고 싶었지만 엄청 내리는 눈에 질려 그만뒀다.
  떠드는 소리 보다 목소리가 작은 것이 수업공해가 됨을 일렀다. 크게 대답하는 것이 자신감과 목소리를 키워주는 첫 걸음임을 알리고 집에서 훈련하도록 부탁하며 두 번째 만남을 끝냈다.
  아이들 엄마 딸려 보내고 돌아오는데 배고픈 참새 멧새들이 눈 없는 향나무 밑으로 파고들어 허겁지겁 흙을 쪼아댄다. 학교 뒷산에서도 잘 눈에 뛰지 않던 멧새가 반가워 가까이 다가가 한동안을 지켜보는 데도 날 아랑곳하지 않고 먹이를 찾느라 정신이 없다. 이 나무에서 저 나무 밑으로 몇 무리의 새들이 우르르 달려들며 날 완전히 무시한다.

  감자 고구마가 주식 이였던 어린 시절. 들로 산으로 쏘다니며 나물 뜯고 잔대 뿌리 캐어 반찬거리 마련했다. 보쌈 묻어 두고 꽃피라미 모래마주 지칠 때까지 쫓아다녀 잡았다. 한 꾸러미 잡아 보란 듯 흔들며 돌아와 어머니께 자랑스레 내밀었다. 고추장에 풋마늘 파란 잎줄기 듬성듬성 썰어 넣고 끓여주신 그 맛을 잊을 수가 없다. 
  눈 쌓인 겨울이면 동리사람 모여 토끼몰이 나셨다. 번번히 허탕을 쳤지만 따라다녔다. 새탑새기 놓아 새 잡아 짚불 속에 구워 뼈채 씹어 먹으면서도 그 맛에만 취했지 가엽다는 생각은 없었다. 자연보호 따윈 없어도 언제나 그 곳에 가면 있었고 많았다. 아무런 죄의식을 갖지 않았었다.

  이렇게 무서운 날 몰라주다니! 사람 무서움을 몰랐는지 잊었는지 무시당함이 신선했다. 교실로 들어와 창문을 닫는데 한 쪽 구석에서 참새 두 마리가  책책 거린다. 살금살금 다가가니 화들짝 놀라 날아가다가 유리창에 머리를 박고 떨어진다. 몇 차례를 더 시도하다 한 놈은 무사히 탈출했는데 다른 한 놈은 벌렁 나뒹굴어 졌다. 가만히 두 손바닥으로 감싸 쥐었다. 따뜻했다. 놀란 새가슴이라 더니, 눈을 감은 채 색색 숨을 가쁘게 몰아 쉬는 녀석이 가엽다. 머리에 충격이 컸었나 보다.
  얼마를 지나자 정신이 드는지 눈을 떴다. 말똥말똥 쳐다보는 눈빛이 너무 선하여 애처롭다. 아직은 날아 갈 힘이 없는지 내 손안에서 꼼짝을 않는다. 비스킷 부스러길 눈앞에 내밀어도 반응이 없다. 얼마 후, 늘어진 다리와 날개에서 뻗치는 힘이 느껴졌다. 손바닥을 살짝 펼치고 비스킷 부스러길 다른 손바닥에 놓고 아기 어르듯 했다. 한참을 망설이던 놈이 순간 비스킷을 쪼아 보더니 연신 쪼아먹질 않는가! 그 모양이 귀엽고 예쁘고 신기했다.
  인간이나 짐승이나 배고픔은 견디기 어려운 고문이다. 훈련병 시절 배고픔은 간덩이를 붓게 하여 창피함 두려움을 잊게 했었다. 창가로 갔다. 눈은 쉼 없이 내리고 있다. 창틀 위에 참새를 올려놓았다. 곧장 날아 갈 줄 알았는데 가만히 앉아 잇는다. 일자리 없는 사회에 내몰린 이태백들이, 한창 일할 나이에 짤린 사오정들이 험난한 사회를 무서워하듯 눈 속이 무서웠나 보다.
  뜸을 들이던 참새가 고개를 빼고 몇 번인가를 두리번거리더니 이내 눈 속으로 사라졌다. 나래질에 힘이 없어 보였다. 봄눈은 금방 녹을 테니 잘 참어주길 바랬다. 뜻밖의 폭설은 재난만 남기는 것이 아니다. 자연과 인간의 새로운 만남을 주선하고 인간의 거친 마음씀을 유순하게 길들였다.
  백년만의 폭설이란다. 눈은 이틀이 지나도 녹질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