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물(多勿)의 뜻은
다물(多勿)의 뜻은 '오방색'이었을까
* 다섯가지 오방색을 따라 구성한 전통 복주머니. 중앙이 황제의 색 황색이고
나머지가 동서남북의 청백홍흑이다.
지난 십년 픽션 사극의 흥행과 함께 고구려사는 한국고대사의 여러 어휘들을 양산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다물(多勿)'이다. 그런데 이 다물이라는 말의 본래의 뜻은 아직도 애매모호한 것이 사실이다.
'다물(多勿)'이라는 말이 우리나라 기록에서 위서의 하나로 알려진 <한단고기>의 태백일사 고구려 본기에 나오는 <다물흥방가(多勿興邦歌)>에서 언급하는 勿其興邦自存라는 말에서 기인한다. <한단고기>가 구한말 또는 20세기초에 위작으로 지어졌을 것이라는 문헌학적 판단은그 속에 씌어진 어휘들 가운데 '文化' 등 일본의 영향을 받은 근대어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한단고기>에 인용된 내용들은 오래된 전통 어휘들도 들어 있을 수는 있다.
<한단고기>의 '다물흥방가(多勿興邦歌)'는 고구려의 안장(安藏)왕 때 을밀선인(乙密仙人)이 불렀다는 노래인데 그 가운데 多勿其興邦自存이라는 구절은 다분히 '제국주의적인' 의미가 들어 있다.
"다물은 열방을 거느리고 독립된 황제국을 만든다"는 의미가 多勿其興邦自存이다. '흥방(興邦)'이란 제후국들을 많이 거느린다는 것이고, '자존(自存)'이란 스스로 지존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多勿其興邦自存이란 말하자면 제국으로 나라가 크게 다시 일어난다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다물이 북송시대에 편찬된 <資治通鑑(자치통감)>에서 고구려말이라고 언급했다는데서 다물은 우리의 옛말임을 알 수 있다. <資治通鑑>에서 麗語謂復舊土爲多勿라고 한 것은 “고구려어로 옛땅을 되찾는 것을 다물이라 한다"는 의미이다.
그렇게 보면 다물은 復舊土(옛땅을 회복)하여 其興邦自存(제후국을 거느린 지존) 국가가 된다는 의미를 가진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옛땅 다물은 '옛땅을 되찾는다"는 의미만 들어 있지 그 '다물' 자체가 가지는 본래의 뜻은 나타나 있지 않다. '다물'은 어떤 상태의 '옛땅'을 의미했을까? 고구려말이었던 '다물'의 본뜻을 추적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다물을 그동안 논쟁되어 왔던 만주어나 몽골어의 "da muru' 등의 일반적인 의미로 풀이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 분명 고토를 회복한다는 것은 잘나가던 나라의 영토를 회복하는 것을 말하는데 형용사나 동사의 보편적인 언어를 대입하는 것은 타당성이 약해보이기 때문이다.
흔히 지금까지 나온 '다물'의 뜻풀이를 위하여 '다물'을 풀어 써서 '다무루'였을 것이라는 근거는 없다. 만주어에서 아무리 da muru의 "다 da"가 뿌리나 근본을 의미하는 것들이 있다거나 "무루 muru"가 '모양'이라는 뜻이 있다 해도 '다물'이 '다 무루'로 표현하는 것은 일본어식 연읍법칙으로 풀이해야 할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다물'이 몽골어의 "타미르(tamir)"에 연관이 있다는 근거는 그 뜻이 동물의 힘줄(sinew)의 의미로 힘을 상징한다는 것인데 '타미르'가 우리말과 그 어떤 연관성을 찾기 힘들다는 것은 만주어의 '다 무루'와 마찬가지다.
* 오색 무지개를 연상하게 하는 우리민족의 색동저고리.
'다물'이 어떤 우리말이었는지 알기 위하여서 현대의 우리말에 유사한 것을 찾으려 해서는 안된다. 그렇다고 해서 '다물'이 고조선 때부터 내려온 태고적 말이라고만 여길 근거도 빈약하다. <자치통감>에서 언급한 '다물'은 과연 고구려때부터 있어온 것인지 실제로는 통일신라나 고려시대의 언어인지는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자치통감>은 중국(中國) 북송의 사마 광이 1065년부터 1084년에 걸쳐 펴낸 것이다. 북송시대의 우리나라 인식은 고구려를 고려라고 하거나 신라를 고려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따라서 '다물'이 꼭 고구려나 고조선의 말로 본다는 것도 불확실한 것이다.
특히 다물(多勿)은 '되물다' 등의 형용사나 동사의 뜻이거나 단순한 생활용어로 보기에는 고토를 회복하는 제국이 가졌던 언어로서는 부적합한 뜻이 된다. 왕의 이름을 일반인들이 쓰지 못하도록 귀하게 했던 것처럼 고대의 위대한 제국적인 상징의 언어들은 일반인들이 잘 쓸 수 없는 지배층만이 사용하는 신화적인 배경을 가지는 상징성이 강한 문화에서 나온 어휘일 것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렇다면 '다물'은 무엇일까?
필자는 몽골인들이 옛부터 코리안들을 부를 때 '솔롱고'라고 불렀다는데 주목한다. 몽골말 솔롱고는 무지개라는 뜻이다. 왜 코리안들이 무지개로 표현되었을까? 위의 사진에서 보는대로 오색 색동저고리를 입었기 때문일까? 무지개는 칠색이 아닌 '오색이 영롱한'그 오색 무지개다. 솔롱고를 우리 말로 하자면 '오색'이다. 그러나 그 오색(五色)은 한자말이다. 그렇다면 오색을 순 우리말로 하자면 어떻게 표현되었을까?
색(色)이라는 한자말은 우리말로 '물'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물감'의 물 바로 그 빨간물, 파란물 바로 그 '물'이 色에 대한 오랜 우리말이다. 그렇다면 오색의 五는 다섯이며 다섯이 접두어로 되면 '다'가 된다. 다섯 색갈은 '다물'이 되는 것이다.
셋은 서넛이라고 할 때의 접두어는 '서'가 되고 넷은 너뎃의 '너'가 되고, 다섯은 대여섯 또는 '닷되'에서처럼 '다'가 된다. 다섯가지 물(물감)은 '다물'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오색(五色)"의 우리말은 '다물'이라고 필자는 풀이한다. 몽골인들이 우리민족을 칭했던 솔롱고의 오색 즉 '다물'이 우리민족의 본래의 잘나가던 시절의 칭호다.
*우리민족의 전통 오방기 모양(왼쪽)과 고구려 고분 천정.
무지개와 같은 오색은 다섯방향의 색을 말하는 오방색(五方色)을 말하고 중앙의 누런색을 바탕한 황제의 색으로서 정치적인 프리즘이었다. 오방기는 황제가 군대를 움직일 때 사용한 다섯 색의 깃발이다. 그것은 중앙의 누런색인 황제깃발을 중심으로 변방의 제후국들의 각각의 군대들이 청기 흑기 백기 홍기를 앞세우고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
우리말로 하자면 푸른 물 들인 깃발, 검은 물들인 깃발, 흰 물들인 깃발, 붉은 물들인 깃발들이 사방에서 중앙의 누런 물들인 황제의 깃발을 호위하면서 진군해 나가는 것이 오방색 즉 '다섯물' 인 '다물'깃발이다. '다물'인 바로 '다섯물'은 오방기의 제국 의미에 연관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는가. 홍청흑황백 오색으로 구성된 '오방기'는 과거 다물이 흥방자존했던 역사적인 황제국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하여 오늘날도 무당들의 깃발로 남아 있다.
다시 말하여 다물흥방(多勿興邦)이란 황제국가가 변방을 흥하게 해준다는 제국의 변방에 대한 약속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물은 옛 제국의 영화를 회복한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중심인 제국 자체를 포함하여 사방의 변방들이 흥한다는 의미에서 흥방이란 '사방이 흥한다'는 의미가 된다.
고대 우리민족이 사방의 변방을 거느린 중앙의 황제의 의미로 쓴 황릉은 집안 장군총 (集安 將軍塚) 등에서 남아 있는 고대 한민족의 피라미드에서 찾을 수 있다. 고조선 또는 그것을 이은 고구려의 장군총과 같은 피라미드들은 동서남북의 사방을 평정하고 중앙을 높이 받들어 세운 사각뿔 형태이다. 피라미드는 오방사상에서 나온 제국주의적 황릉이라는 것이 필자의 해석이다.
* 고구려 장군총
특히 장군총과 같은 한민족의 고대 피라미드는 본래 그 피라미드를 쌓은 외벽에 물감으로 칠을 해두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된다. 동쪽 면은 푸르게, 서쪽 면은 희게, 남쪽 면은 붉게 북쪽 면은 검게 칠한 뒤에 피라미드 꼭대기에는 황색의 지배자 색을 썼을 것이라는 것이 나의 추측이다.
석굴암 본존불이 지금은 돌색만 남아 있지만, 본래는 색을 칠했다는 것이 드러났다. 필자가 장군총 등의 고대 동북아시아의 피라미드들을 둘러본다면 석굴암 본존불처럼 돌 어딘가에 칠한 물감 흔적의 여부를 찾아보고싶다.
피라미드에서 보는 것처럼 중앙을 중심으로 올려 사방의 변방을 흥하게 해주는 오색흥방 즉 다물흥방(多勿興邦)은 우리민족의 고대 '제국'의 상징으로 쓰여졌던 것이다. 이러한 다섯물 즉 '다물'(오방색)을 바탕으로 국제적으로 변방을 향한 도로를 만들 때도 다섯 방향의 도로를 냈다. 그것이 발해 오도(五道)에 남아 있다.
발해 오도는 ‘일본도(道)’ ‘신라도’ ‘조공도’ ‘영주도’ ‘거란도’ 등 다섯 개 교통로를 국제교역로로 만든 것이다. 비록 당나라에 조공을 바치는 조공도를 포함시키고 있기는 하지만, 발해 오도는 옛 제국주의적 도로 시스템을 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로마제국의 도로들은 발해로 말하자면 모든 도로는 다섯방향에서 발해로 들어오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래 그래픽 참조)
'다물' 즉 다섯 색갈의 오방기의 황제기를 앞세워 '옛영토의 회복'은 단순히 땅을 옛날만큼 차지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라의 지위가 변방을 거느린 중앙 제국으로 다시 회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위의 지도에서 발해는 당나라에 조공을 바치는 조공도가 있는 한에는 그것은 '다물' 즉 본래의 다섯 색갈의 오방색을 사용하는 황제의 국가가 아니게 된다. 중앙의 황색은 당나라 차지가 될 수 있는 도로가 '조공도'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발해는 '조공도'가 아닌 "옛날 영토"를 회복하는 것을 희구했다면 그것이 '다물' 즉 오방색으로 표현되는 흥방자존을 되찾는 것이다.
윷놀이가 고조선의 오가(五加)에서 나온 다섯 동물의 토템에서 나왔다면 그것은 소를 중심한 다섯 변방의 나라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하는 과정을 그린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필자의 윷놀이에 관한 글 <윷의 오색: 홍돼지, 푸른개, 흑염소, 황소, 백마>를 참고할 것).
고조선의 피라미드는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메소 아메리카의 아즈택과 마야 피라미드들과도 그 제국주의적 코스몰로지가 통해 있다. 한민족의 피라미드는 오가(五加)의 가축 토템들과 연관하여서 피라미드의 사방을 네 가지 동물들이 지키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김유신장군의 묘가 십이지신상이 지킨다는 개념과 일면 맥이 통해 있기 때문이다. 그런면에서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지키는 스핑크스는 한 마리가 아니라 사방에 각각 다른 동물들이 지키고 있었거나 그러한 사방 동물 토템의 '사신도'의 한 잔재로 남아 있을 개연성이 높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 스핑크스는 피라미드의 사방을 지키는 수호신일 때 그것은 한민족의 고대
피라미드 오가 토템의 한 형태라 할 수 있다.
이집트 피라미드와는 달리 북미인디언들의 흙으로 만든 피라미드나 메소아메리카의 아즈택이나 마야인들의 피라미드는 무덤으로서만이 아니라 제왕이 가지는 거주 형태이기도 했다. 이들 피라미드는 무덤은 아래쪽에 배치하고 상층부는 지배자의 거주 공간으로 배치한 성채와 같은 역할을 했다. 지배자들은 사방을 변방으로 장악한다는 의미의 피라미드 사각뿔 형태의 거대한 성채 꼭대기에 거주했다. (아래 사진참조)
* 마야인들의 전형적인 피라미드 형태는 상층부에 지배자가
살았고 그 아래에 선대 지배자들의 무덤이 있었다. 이러한
형태는 아래쪽은 선대 달라이라마들의 묘를 배치하고 위쪽은
언제나 현생 달라이라마의 주거로 배치했던 티벳의 포탈라궁
구조와 같다. 음택과 양택이 상하로 놓인 것이다.
음택과 양택이 상하로 놓인 것에서 <주역>의 상하 두 가지의 음양괘의 포갬을 풀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음은 아래에 양은 위에 있다는 면에서 마야, 아즈택 피라미드와 같은 상단부에 주거 건물이 있었던 고대 한민족의 피라미드 형태의 잔재는 달라이라마를 14대나 계승한 티벳의 포탈라궁의 구조에서도 찾을 수 있다. 아래에는 전대 달라이라마의 무덤을 안치하고 상층에 생존 달라이라마의 주거 궁으로 삼아왔던 것이 라싸의 포탈라궁이다. 음택과 양택 즉 음양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닌 한 성채 안에 공존하고 있도록 배치한 것이다.
* 김유신장군묘의 둘레에 십이지신상 중의 하나인 말신(馬神) 부조. 태왕사신도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북방 피라미드형처럼 음택(고분)과 양택(주거)이 한 성채 피라미드에 존재한 곳도 있지만 남방의 고분형태처럼 고분자체만이 분리된 것도 존재한다. 김유신장군 묘는 일종의 '장군총'이다. 다만 그 각이 12방향으로 나뉘어져 있을 뿐이다. 위의 사진에서 보듯이 김유신장군 고분처럼 동물 토템들을 부조로 새겨넣은 신라의 고분조성 형태는 외부에 스핑크스를 세운 이집트의 피라미드 부류에 가까운 것을 볼 수 있다.
고구려 고분이 장군총처럼 외부의 사방 피라미드가 아니더라도 내부 형태는 사방으로 사신도가 그려져 있고 천정 궁륭형태가 피라미드 형식으로 사방이 겹쳐 올라도록 구성되어 있다. (아래 고구려 고분 도형과 사진 참조)
그런 반면에 남방계로서 신라의 김유신 장군묘는 십이지신상을 바탕으로 밖으로 '열두대문'의 형태로 둘러져 있다. 이러한 열두 지신은 석굴암의 천정 궁륭에서도 열두개의 공포 돌을 고여 놓은 것에서 같은 맥락의 십이진법을 따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래 석굴암 천정 사진참조)
* 석굴암 천정 중앙부에는 사신도와 사각형을 이루는 고구려 고분과는 달리
12개의 공포석이 배치되어 있다. 이러한 십이진법은 김유신장군묘의
십이지신상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있다.
사찰이나 암자는 부처의 시신을 모신 자리의 의미를 가진다. 석굴암은 일종의 고분이라 할 수 있다. 사신도나 십이지신과 같은 동물 토템을 본존불이 위치한 원형의 방 앞부분인 전실에는 고대 인도의 짐승신들인 팔부신중(八部神衆)상이 부조로 배치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서는 필자의 글 <십팔기(十八技) 기원은 십팔나한(十八羅漢) 무술>을 참조하라)
남방계의 십이지신이든 북방계의 사신이든 동물토템이 그려져 있는 것은 북미 인디언들게서도 볼 수 있다. 아즈택과 마야인들의 방형의 피라미드가 있는가 하면 일반 인디안들의 티피는 원형이다. 인디안들의 둥근 티피는 우리 민족의 원뿔형 집 움막을 닮아 있다. 사신도나 십이지신상 또는 팔부신중상을 배치한 우리 민족의 음택의 토템처럼 인디안들의 양택인 티피에는 그들의 토템인 버팔로 황소를 그려넣거나 늑대 또는 곰을 그려넣기도 했다는 것은 같은 '지신' 맥락이다.


다섯가지 동물 토템을 사방과 중심에 수호신으로 그려넣은 것이 고구려 장군총 또는 고조선의 돌 피라미드 형식의 고분형태이다. 인디안들의 티피에 그려넣는 토템 동물들도 색갈을 넣었다. 즉 물을 들인다. 우리민족의 오방색과 일치하지는 않으나 인디안들도 동서남북 각각의 색이 있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여 다물의 우리말 뜻은 북방형 제국주의 중심을 상징하는 다섯가지 물 즉 '다물'이라고 필자는 해석한다. 다섯가지 동물 토템을 의미하는 윷말 다섯가지나 사신도와 천정을 이루는 오방사상의 고구려 고분형태는 다섯 신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다물'의 유물이다. 그것들은 각각의 오색 즉 다섯가지 물(색)을 의미하는 제국적 중심을 의미한다.
고구려인들이 '옛영토를 회복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자치통감>에서 말하는 다물(多勿)은 다섯동물의 색갈을 드러내는 다섯물의 '다물'로서 고구려인들의 오방색에 대한 우리말 '다섯 물'에서 나온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고구려 장군총이나 만주벌판에 널려 있는 고대 우리민족의 피라미드들을 보면 '옛영토의 회복'을 의미하는 '다물'의 상징을 읽을 수 있다.
중국인들이 왜 현재의 그들의 영토 내에 있는 거대한 피라미드들을 숨기고 있을까? 동방의 고조선이나 고구려의 '다물'였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아래의 씨안에 남아 있는 수많은 피라미드들은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이들 미스터리의 피라미드 발견은 1945년에 인근을 비행하던 독일주둔 미국 수송기조종사의 사진촬영과 보고서에 의해서였다. 1973년에 실시된 고고학계의 탄소연대 측정에 의하면 진시황무덤보다 수천년 앞서 만들어진 것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그것은 황하문명보다 이전인 약 5,6천년 전이 된다.
현재, 이 유적들은 중국 공안당국이 숨겨서, 학술조사도 불가능하다. 독일인 하우스돌프씨가 촬영한 피라미드 사진이 책으로 나와 있다. 그러나 중국 당국은 독일학자의 사진과 보고서는 조작이라고 발뺌했다가, 이제 더 이상 숨길 수 없이 정보가 퍼져 나가자. "아직 발굴기술과 유물 보존기술이 부족해 다음세대로 발굴을 연기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중국의 북부에 위치한 이들 피라미드는 '들여쌓기 공법'인 계단식 피라미드로서 옛 고조선 고구려 지역과 한반도에 널려있는 고구려 피라미드들과과 똑같은 모양과 형태를 보이고 있다.
중국 시안에 있는 피라미드 군락지
티벳에 있는 대형 피라미드
파괴하여 없애버린 흔적
나무를 심기전 피라미드
나무를 심은 후
피라미드에 나무를 심어 파괴하면서 은페시킨 흔적
만일에 중국 역사의 피라미드라면 중국당국은 이렇게 왕릉에 나무를 심지 않았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중국 당국이 반 세기 이상 국제 사회에 이러한 피라미드를 숨기고 있다는 데 있다. 왜 피라미드에 나무까지 심어 은폐하려 했을까? 미국의 디스커버리 채널은 왜 이러한 내용을 심층취재하지 않을까?
현재도 이러한 피라미드들을 제거하거나 은폐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없어진 것만도 수도 없이 많다고 한다.
항공촬영
중국 당국은 피라미드에 외국인 접근을 철처히 봉쇄하고 있다
독일인 하우스도르프씨가 촬영한 피라미드 군락
하우스도르프씨가 피라미드 군락에서 촬영
하우스도르프씨 인터뷰
디지털복원한 호태왕릉
북한 피라미드(단군릉)
황하문명이 4천여년 전에 시작했다고 가르치다가 중국 당국은 최근 심지어 1만년 이상으로 역사를 올려잡는 공정을 하는 것은 이들 피라미드들을 의식한 때문으로 보인다. 장안지역 피라미드들에 대하여는 중국당국이 고조선 고구려역사와 차단하려는 의식이 짙다. 고구려사 빼앗기의 동북공정은 이러한 피라미드 역사 때문으로 보아야 한다.
신화통신이 이들 만주 북서부(내몽골) 피라미드들은 5천년 이상된 것이라고 보도했다는 것은 더 이상 막을 길이 없는 엄연한 역사적 잔재이다. 이들 지역은 중국 지역이 아닌 동이족 등의 외곽지역 문명이다. 중국지역이 아닌 것이다. 그 속에 어떤 부장품들이 묻혀 있는지 아무도 아직 발표한 적도 없고 정보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 구글로 본 중국 씨안(西安)에 있는 피라미드
그 외에도 만주 일대에 확인되지 않은 피라미드들이 수 없이 서 있다. 현재까지 밝혀진것은 100개이상인 이들 피라미드의 평균 높이는 25 ~ 100 m로 이집트의 최대 피라미드보다 더 큰 것도 있다고 한다.(아래 사진들 참조) 제작시기도 이집트보다 2천년 이상 앞선다는 주장도 있다. 고구려인들이 말하는 '다물'이라면 피라미드의 의미와 함께 고조선의 화려한 세력을 다시 확보하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다물'은 고조선과 고구려의 피라미드의 코드로 읽어야 한다. 우리의 고토회복의 의미는 그 속에 숨어 있다. 거기에는 다섯가지 물(물감의 물)인 다물의 오방색이 의미하는 다물흥방(多勿興邦)의 비밀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